【최초의 국외원정】제도기독교개비짱회는 1912년에 거듭 온 그리움유학생 모국방단락과 맞대결도 돈벌이고 서로 힘을 합쳐 구한국안의 왜팀들을 당파하는 낙도 맛본 끝에 1913년 11월에는 ‘일본원정’에 나사선다. 금번 구한국베이스볼의 궤적 6회차에서는 대한민국 스포츠 최초의 국외원정에 대하여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것이 계림 스포츠사상 최초의 국외 원정이었다. 안녕하세요 “기억의 기호볼” 노준광의 블러그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도기독교개비짱회는 구한국 안의 왜 팀들을 꺾었다는 전과를 내세워 아등도 이만하면 일본 본토 팀들과 가일층 만하지 않은가 하는 긍지이 보푸라기어 있었고 모임를 뼈한 일본뉴스들도 고조선으로부터 석경주 명인들이 일본을 찾아와서 막강한 강제력을 과대할 참이라는 식으로 과장보도해서 간객들의 호기심울 부추겼다. 겹 도용탁과 김일, 이규정은 그리움유학생으로서 서울에서 기독교개비짱회와 연합군을 구성, 왜팀들을 당파하는 데 앞장섰던 됨됨이들이고 일본에서는 유학생 변봉현과 유동수가 가세했다. 그러나 제도기독교개비짱회는 난생처음 맞선 일본 전통의 세상 와세다대학에 23-0으로 슬픔한 패배를 듣다 등 일본원정에서 1승1무5패라는 괴로움한 결과만을 남기고 돌아왔다. 이 원정단은 감독관 김린을 비롯, 피처 도용탁, 사냥꾼 군소리, 1루수 김다년호와 김일, 2루수 김영환, 3루수 현홍운, 유격수 이규정, 좌익수 김영제, 센터 김유, 우익 김춘식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팀은 ‘개비짱회당팀’ 으로 명은 유지해 나가지만 1905년 설립 이래 최강팀을 가꾸어가던 제1대들이 일탈함에 따라 설립한지 만 10년도 되기 전 전체적인 모양새는 붕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베이스볼단 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질레트 원내총무가 105인 문제에 연좌돼 반강제적인 추방을 면치 못했고 군소리이 미연방으로 유학을 떠나는 등 주력대구성원들이 앞을 다퉈 국외유학길에 오르는 가스에 제도기독교개비짱회베이스볼단은 빈각 꼴이 되고 말았다. 소스 : 구한국베이스볼사. 그리고 그들 앞에는 팀 해단이라는 굉장하다 격랑이 기다리고 있었다.